† 청춘다이어리/29살 청춘다이어리

19세.. 29세 열차여행 - 안채영의 청춘다이어리

부자엄마 가난한엄마 2013. 11. 2. 09:00

 

 

 

 

 

19세.. 29세 열차여행

 

 

이른 아침부터 지인의 결혼식 덕분에 열차여행 떠나는 중~ 아웅~ 조으당~♡

KFC치킨과 오랜지주스, 밀크티를 바리바리 싸들고 열차에 올라탔는데, 앗뿔사! 내 옆자리에 너무 잘생긴 남성이 앉아있었다. 헐.. 망했다.. 이 사람 옆에서 치킨을 우째 뜯으란 말인가!ㅜㅜ 하지만 다행히 30분쯤 지나자 이 남자는 취침모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앗싸~! 이때다~! 맛있게 냠냠^-^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며 창 밖을 보고있는데, 10년 전 옛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딱 10년 전에도 나는 열차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내가 타고 있는 열차, 주변의 환경이 모두 변해있다.


철이 조금 들기 전인 20대 중반까지도 나는 젊음이 싫었다. 그래서 빨리 나이가 들기를 원했다. 이제 두 달 후면 맞이하게 되는 서른.. 나는 30대를 그토록 원했다. 그 이유는 젊음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의 어느 날,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사주를 보러간 적이 있었는데, 점쟁이는 내게 10~20대까지 앞이 안보일 만큼 먹구름이 가득하고 깜깜하다고 했다. 누구나 쉽게 넘어가는 돌부리에도 나는 걸려 넘어져서 혼자 아파하고 다쳐서 울기를 반복하며..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에 순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러워만 하며 나이를 먹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남들보다 100배, 1000배의 노력을 했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아무리 내 삶이 암흑이라도, 노력이 운명을 아주 조금이라도 뒤집을 수 있을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29년이라는 시간을 돌이켜보면, 고통은 내게 축복의 시간이었다. 성경에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 (욥기 23:11)라는 구절이 있다.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얻을 수 있었던 신이 주신 귀한 깨달음의 선물.. 그리고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오늘의 내 모습..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고, 봉사의 삶을 실천할 수 있다는 희망 등등.. 나는 그 시간들을 통해 단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19세의 내 목표는 리더십전형으로 원하는 서울지역의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당시 전교학생부회장과 전국고등학교총학생회 복지부국장이었던 나는 한 달에 몇 번씩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다양한 시민단체 사람들과 정치인, 전교학생회장, 부회장 등을 만나며 행사진행, 토론프로그램 출연 등을 했었다. 하지만 선생님과 부모님께서는 외부활동 후 성적이 수직 하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가 아닌 다른 활동에 집중하는 내 모습을 불안하게 느끼셨고, 심하게 반대를 하셨다. 그래서 용돈이 끊겼다. 용돈이 없으면 활동을 하지 않을것이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내는 나의 근성은 이미 그때부터 형성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교복을 입고 동대구역으로 가서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아저씨들께 서울에 가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만원만 달라고 부탁하면서 몇 만원씩을 모아 서울로 갔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허름한 무궁화 열차 입석을 타고 사람들 사이에 이리저리 끼여서 4~5시간씩 서서 서울로 갈 때 마다 몸은 힘들었지만 내가 꿈꾸는 일을 하고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가서 활동이 끝나고나면 밤이 외로웠다. 서울에는 친척도 지인도 없었기에 나를 재워주는 사람도 없고 갈곳도 없었다. 그래서 새벽 4시까지 불을 켜놓는 동대문으로 가서 건물안 계단이나 야외의자, 지하철 의자나 계단에 기대서 잠을 자곤 했었다. 지금 내가 동대문을 좋아하고 의류쇼핑몰까지 운영하는 것은 어쩌면 그 때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고생을 했지만 나는 리더십전형 최종면접에서 탈락을 했고,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서 파릇파릇 새내기 대학생활을 즐기는데, 내 모습은 비참했다. 학생들끼리 하하호호 웃으며 옆구리에 책을 끼고 지나가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사회에서는 안채영이라는 이름 앞에 늘 학교명이 따라다녔다. 학벌위주의 평가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서러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반드시 내가 원하는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리라는 결심을 하며 바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왔고, 독하게 공부를 해서 1년 반만에 한양대 생화학 및 분자생물학과 편입에 성공했다. 그 후로도 나는 적성을 찾기 위해 3번의 대학입학과 자퇴, 2번의 대학원진학을 하게된다. 그 후 21세에는 나처럼 학벌위주의 평가에서 고통받는 청년들을 구제해주고자 편입컨설팅 교육사업을 시작했지만, 마음이 맞지 않은 동업으로 인해 머지 않아 사업을 접게 된다.

아.. 요즘은 내 생각과 추억들을 최대한 글로 많이 남겨두고 싶은데, 핸드폰으로 글을 쓰려니 손가락이 아파서 더 이상은 못쓰겠다. 오늘은 요기까지^^

열차를 타고 있으니 옛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데 그 기억들이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열차는 내게 사색과 추억의 공간인 것 같다^^

이제 두 달 남은 나의 30대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 또 다시 펼쳐질 새로운 모험들이 무지하게 기대된다. 29세가 되니 친구들은 우르르 시집을 가고, 주변 사람들은 이제 모험 그만하고 더 늦기 전에 결혼을 해야한다며 많은 충고를 하지만, 생각해보니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 같다. 암흑 같은 깜깜한 동굴도 지나왔고, 주변사람들은 안된다고 반대할 때가 많았지만, 나는 때때로 해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도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남들이 사는대로 떠밀려서 살 필요가 무엇이 있을까?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는 것이고,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결혼도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인연이 닿으면 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인생의 순리는 물처럼 흘러가는 가운데, 그 물줄기의 방향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열차여행을 하는 지금도 내 인생의 일기장은 넘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어쩌면 내 인생의 일기장에는 아름답고 좋은 페이지 보다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페이지가 더 많을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신이 왜 내게 고통을 주시는지 그 의미를 조금은 더 알게 되었으니까.. 감사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며, 그 모든 순간을 즐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2013.11.02 안채영의 청춘다이어리